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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에 노출된 삶
  • 박희정 기자
  • 승인 2019.09.10 10:02
  • 호수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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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화학물질은 음식, 가구, 화장품, 컴퓨터에서 장난감, 치약에 이르기까지 사방에 존재한다. 이들 화학물질은 우리의 삶에 다양한 혜택을 가져다줬지만, 그에 대한 공포 역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화학용품들이 재조명되면서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화학물질 안전 기준

현재 얼마나 많은 화학물질이 쓰이고 있는지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매년 약 2000가지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탄생하고 있으며, 25년마다 화학물질의 생산은 2배 정도씩 증가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1만 7000여종(2016년 통계조사결과)이 유통되고 있고, 그 가운데 신규물질은 5000여종(4.3%) 된다.

물론 모든 화학물질이 인간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화학물질이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유통된 화학물질은 되돌릴 수 없다. 어떤 물질들은 유통된 후 분해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며, 인체에 축적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1976년에 완전히 밀봉되지 않은 폴리염화비페닐의 생산, 가공, 유통, 사용을 금지했는데, 이는 호르몬 분비, 신경계, 그리고 면역체계를 혼란시키는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규제가 일본, 캐나다, 서부 유럽에도 존재한다. 2001년 스톡홀름 협약에서는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과 11가지의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을 지구상에서 없애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생산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물질들은 여전히 자연과 인체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는 위험이 증명되지 않은 경우, 특히 그 위험이 즉각적으로 유해하다고 밝혀지지 않은 경우는 그것을 안전하다고 가정해왔다. 그러나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발표된 예방 원칙성명을 통해 많은 잠재적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심각하고 되돌릴 수 없는 피해의 위협이 있을 경우, 완전한 과학적 확신의 부족을 이유로 자연파괴를 예방하기 위한 비용효율적인 조치들을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원칙은 우려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당위성을 부여한다.

 

제도 개선에도 안전에 한계 존재

화학물질의 인체영향을 알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우선 장기 안전성 테스트 시스템이 미비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우리는 인체실험을 진행할 수 없고 자궁에 들어가 볼 수도 없으며, 태아를 상대로 시험을 해볼 수도 없다. 물질들이 세심하게 관리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평생에 나타나는 노출의 영향을 감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화학물질은 먹이사슬에 쌓이기 시작해 사람이 먹는 동물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화학물질은 신체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고 호르몬체계를 파괴하며 암과 다른 질병들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심지어 북극의 이뉴잇인들 역시 먹는 음식을 통해 먼 곳에서 바람을 타고 온 잔류성유기오염물질과 같은 독성화학물질에 노출된다. 이뉴잇인들은 기후가 온화한 지역의 사람들보다 10~20배가량 많은 잔류성오염물질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스스로에 영향을 미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스톡홀름 협약 합의에 이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유럽의 경우 지난 2007년부터 사람의 건강 및 환경에 대한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예방하는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를 시행하고 있다. 안전성 검증이 없는 화학물질은 시장출시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RECAH 외에 별도로 소량물질의 유해성을 관리할 수 있는 CLP, 즉 화학물질 및 혼합물의 분류, 표시, 포장에 관한 규정이 있어 모든 화학물질 혼합물을 관리 중이다. 유럽은 CLP 제도에 따라 업체에게 양에 관계없이 모든 신규 기존 화학물질의 유해성 분류 정보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으며, 혼합물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출하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국내의 제도는 유럽보다는 덜 촘촘하다. 현 제도로는 국내 유통물질의 4.3%만 관리가 가능하다. 95.7%인 53만 4800만톤의 기존물질(1만 2000여종)은 과거부터 국내에 유통됐단 이유로 아직까지 유해성 확인 없이 유통되고 있으며, 가습기살균제 원인물질인 CMIT/MIT 등 많은 기존물질이 관리 없이 유통돼 수많은 사상자를 낸 바 있다.

일본, 미국도 신규물질 심사제도뿐 아니라, 기존물질에 대해 우선순위를 정해 평가하고, 기업에게 평가에 필요한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드러나고 있는 인체 영향

화학물질로 인한 대표적인 인체 영향으로 환경호르몬 작용을 들 수 있다. 야생동물 등에서 나타나는 환경호르몬에 의한 영향으로 판단되는 이상현상들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환경호르몬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선진국의 연구보고에 따르면 남성의 정자수 감소에 의한 불임, 자궁내막증, 유방암, 생식기 이상과 같은 여성질환 유발뿐 아니라 생식기와 내분비계, 면역계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태아에게는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환경호르몬 같은 물질은 체내에 한 번 흡수되면 잘 배출되지 않고 계속 축적돼 다음 세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노출되지 않는 것이 좋다.

플라스틱은 현대 생활에서 혁명적이라 할 정도로 많은 분야에 사용되고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 물질이지만, 환경호르몬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생활용품이다. 문제가 되는 플라스틱 제품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첨가하는 프탈레이트는 페인트, 잉크, 접착제와 화장용품 등에 사용된다. 또한 잡초, 설치동물, 균류, 곤충 등으로부터 식품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많은 농약들도 호르몬 교란작용을 한다. 일부는 암을 일으키는 원인물질이 되며, 신경이나 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환경호르몬은 우리와 밀접한 생활환경 곳곳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 말고도 사실 집안 곳곳에는 문제가 될 만한 성분을 가진 제품들이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다. 향균비누와 치약, 화장품에 사용되는 트리클로산은 갑상선 호르몬을 방해하는 내분비계교란물질로 알려져 있고, 합성세제와 섬유유연제에 사용되는 알킬페놀 역시 환경호르몬으로 생식과 발달을 방해하는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화장품이나 의약품 등의 방부제로 사용되는 파라벤도 있다. 이 물질은 샴푸와 린스 그리고 로션과 치약 등 사용범위가 대단히 넓은데, 피부 알레르기를 유발하고 내분비계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전문들의 의견이다.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한 환경 만들어나가야

유해화학물질이 이 정도로 생활용품 전반에 걸쳐 만연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국내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 기준을 제시하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지만, 우리 스스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환경호르몬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먼저 환경호르몬의 가장 많은 배출원인 플라스틱이나 비닐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신에 도자기나 스테인리스, 유리로 만들어진 제품이나 용기를 이용하면 좋다. 그 밖에도 농약이 첨가되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을 섭취하거나, 샴푸나 합성세제 같은 화학물질이 포함된 물건보다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상품을 사용한다면 환경호르몬의 악영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인체는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환경이다. 그러니 스스로 주의하고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의 아이들은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해 자신들의 부모세대보다 더 많은 양의 화학물질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 환경독소는 미래세대들이 기후변화와 함께 물려받을 위협요인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감이 있다. 우리는 환경의 일부로서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따라 환경도 우리의 건강을 담보해줄 수 있을 것이다.

박희정 기자  doban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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