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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품은 인왕산, 한양과 서울을 잇다
  • 박희정 기자
  • 승인 2019.10.10 10:00
  • 호수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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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바위산으로서 서울을 품은 내사산 가운데 가장 빼어난 뷰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히는 인왕산. 그 순성길은 4개 구간으로 나뉜 한양도성코스 가운데 마지막 코스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명산들을 바위산의 독특한 지형과 함께 내려다 볼 수 있는 인왕산 정상은 오를수록 험준하지만, 정상에 오르는 순간 등산의 힘겨움은 사그라진다. 마치 신이 빚어놓은 것처럼 도시를 안쪽으로부터 에워싸고 있는 내사산의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놓은 성곽길은 분명 자연과 사람에 생채기를 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그 깊고 넓은 품 안에서만 볼 수 있는 무엇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길이 됐다.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도성을 잇다

서울을 안쪽으로부터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기슭을 따라 조성돼 있는 한양도성은 과거부터 현재를 이어주는 문화유산이다. 그 순성길을 따라 한양의 옛 이야기를 체험하고 당시 사람들이 왜 성곽을 지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중 인왕산 코스는 숭례문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해발 339m인 인왕산은 거대한 바위들이 노출돼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아 북악산과 함께 내사산 가운데 오르기 힘든 산 중 하나다. 북악산은 시작부터 가파른 난코스인 반면, 인왕산은 평지의 성곽길을 따라 숨어있는 문화재들을 둘러본 다음 어느 정도 체력 소모가 된 상태에서 등반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으나 전체 순성길 코스로 봤을 때 북악산과 비슷한 정도의 난이도라고 볼 수 있다.

성곽길의 시작점을 잇는 마지막 코스인 이 인왕코스는 순성길의 백미를 장식한다. 숭례문에서부터 시작되는 평지의 성벽을 따라 한양에서부터 서울을 잇는 근현대사를 통해 지금의 서울이 어떤 도시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밝혀주는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단지 그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그에 터전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인왕코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하겠다.

숭례문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국보 1호 숭례문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초입, 함께 인왕산 순성을 할 사람들이 숭례문 앞에 모였다. 더위는 그대로였지만 날이 흐려 햇볕을 막아준 덕분에 걷기에 무리는 없었다. 물론 경관을 제대로 조망할 수는 없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비가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숭례문은 임금이 행차하거나 중국 사신들이 들어올 때 이용된 문이다. 남쪽에 있는 큰 문이라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태조 때 지어졌고 대한제국 때 도로가 나면서 일부가 헐리고 1907년도 성벽처리위원회가 설치, 일본의 황태자 요시히토가 방문하면서 숭례문 아래로 들어가기 싫다고 해 숭례문 앞에 다른 문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양쪽 날개가 모두 헐리게 된다. 더 안타까운 것은 2008년도에 국가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시민에 의해서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에 휩싸이게 된 일이다. 이 화재로 2층에 있는 문루가 90%, 1층 문루 10%가 불에 타 소실됐다. 현재의 숭례문은 2013년도에 복원된 것이다.

문은 둥근 아치형의 홍혜문과 석축만 있어도 기능을 할 수 있는데 숭례문은 흥인지문(동대문)과 함께 문루를 증축으로 올렸고, 유난히 많은 처마의 조각상(잡상)은 도성을 보호하고 잡귀를 쫓는 역할을 한다. 현판은 다른 사대문과 다르게 세로로 돼있다. 예를 숭상한다는 숭례문의 뜻처럼 사신들이 드나들 때 예를 갖춰서 인사하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세로로 걸었다는 설이 있다. 또 숭례문이 마주하고 있는 관악산의 봉우리가 불꽃모양이어서 관악산을 화기를 갖고 있는 산으로 여겨 화기를 누르고자 세로로 달았다는 설도 있다. 숭례문 앞 쪽 도로를 건너면 남지 터라는 곳이 있는데, 큰 연못이 있던 장소로서 이 또한 관악산의 화기를 달래려 지어진 것이다.

남지터
배재학당

길을 따라 집약된 문화유산, 과거를 걷다

숭례문을 시작으로 조성된 성곽길을 따라 인왕산에 이르려면 순성길 곳곳에 자리한 옛 문화유산들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도로가 나거나 건물이 들어서며 성곽의 모습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지만 그 발자취는 붉은 색 성돌모양으로 바닥에 표시돼 있어 잊지 않고 따라갈수 있도록 돼 있다. 단, 오늘의 서울이 있기까지 걸어왔던 역사의 현장들을 둘러보다보면 한양도성 순성길 도보탐방이라는 것을 잠시 잊을 수도 있는데, 한양도성 성벽 안에 집약된 다양한 문화재들이 한데 어우러져 진정한 한양의 도성을 이루는 것인 만큼, 보고도 알지 못한 문화유산을 함께 들여다보며 그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인왕산 순성을 제대로 하는 방법이다.

그 첫 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독립신문사 터다. 정확히 말하면 독립신문을 인쇄하던 삼문출판사가 있던 터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쓴 민간신문으로서, 만민공동회를 열기도 했으며 왕권사회에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기도 하며, 결국 1899년에 폐간된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는데, 삼문출판사가 자리한 배재학당은 그중 미국인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다.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인 배재학당은 희소한 근대식 교육이 이뤄져 고관의 자제들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독립신문사 터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여러 공사관, 영사관이 세워지며 정동은 유난히 서양식 건물이 많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이국적이고 멋스러운데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정동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배재학당을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는 길목엔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조형물로 설치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남성들이 주도해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힘도 있었던 것이다. 조형물은 1919년도 간도에 있었던 애국부인회에서 만든 선언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된 올해, 이런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노력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일 테다.

서울시립미술관을 조금 지나면 육영공원 터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근대적 학문을 가르쳤고 역시 고관의 자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고관의 자제들 중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가기 싫어 노비들로 하여금 대신 수업을 듣게 해 똑똑한 노비들이 많아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육영공원 터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새겨진 조형물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지나면, 도로 건너 멀리 중명전을 볼 수 있다. 황실의 도서관으로 사용됐던 이곳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을사5적과 이토히로부미에 의해서 강제로 맺어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고종이 네덜란드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에 들어가면 당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는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복원해놨는데 실제와 똑같다.

중명전

돈의문부터 인왕산 초입까지

정동길을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는 구간에 돈의문 터가 있다. 이곳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다. 돈의문은 태조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2)에 만들어진 서전문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했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고,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해 건축자재로 매각했고,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돼 있다.

경교장

돈의문 터에서 바로 이어지는 경교장은 사적 제465호로 지정된 곳으로, 인근에 ‘경교’라는 다리가 있어서 경교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1946년까지 사실상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된 곳으로, 국무위원회 개최와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주 무대가 됐다. 백범 김구가 약 4년간(1945~1949) 거주하다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거 이후 60년간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병원시설등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3월 김구 거주 당시의 임시정부 활동공간으로 복원해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김구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문화가 강한 나라였다고 한다. ‘우리의 힘은 외적의 침입을 막을 정도면 되고 우리의 부는 배고픔을 채울 정도면 되지만, 내가 한없이 바라는 것은 강력한 문화의 힘’이라는 게 김구의 생전 생각이었다고 한다. 최정윤 해설사는 “그 시대가 지금이 아닐까 한다”며, “그분이 그토록 바라던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더 뜻 깊은 하루하루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월암근린공원 일대 한양도성의 옛 흔적들

이제 점점 인왕산 초입이 가까워온다. 그 시작을 알리는 곳은 월암근린공원이다. 2008년에 만든 공원은 조성 당시 성곽이 다 멸실돼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발견되며, 남아있는 것들은 그대로 살리고 그 위로는 현대의 돌을 쌓았다. 그 모습이 마치 한양도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볼 수 있는 전시실과도 같다. 이어진 홍파동 홍난파 가옥 부근 연립주택 건물 주차장 뒤편에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앞쪽 붉은 색 벽돌집이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홍난파 가옥 부근 연립주택 건물, 주차장 뒤편에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이 빚어놓은 듯 깎아지른 인왕산

인왕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게 된다. 등반에 대략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해 있는 그대로의 바위를 살리면서 성벽을 쌓은 모습

인왕산은 돌로 된 산이다 보니 얼핏 보면 바위들이 엉기성기돼 있어 사람마다 보는 바위의 모양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산꼭대기의 바위를 보고 그냥 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태권브이 출동 전 모습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고 있는 곳인, 국사당 위쪽 선바위는 고깔을 쓰고 장삼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불교를 배척했던 정도전이 한양도성의 경계를 정하면서 일부러 이 선바위 있는 곳을 제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어서 역사가 지루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조선 태조 때 남산에 세운 국가 신당은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헐어버렸고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던 무속인들이 인왕선 서쪽 자락으로 옮겨와 사설 무속 신당으로 바꿨다. 우리 조선 수백년에 걸쳐 모신 국사당에 대한 역사적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해발 338m인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뤄진 바위산으로 정상에 가까울수록 험준하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자연 암반이 성벽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인왕산 정상 가까운 곳에는 무악재와 안산(무악) 방향으로 길게 돌출된 곳이 있는데 이런 지형을 활용해 곡성을 쌓았다. 곡성이란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벽을 지형에 따라 길고 둥글게 내밀어 쌓은 성을 말한다. 인왕산 곡성은 현재에도 군사시설로 이용되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된다.

곡성을 조금 지나면 볼 수 있는 범바위까지 오르는 데 40분 가량이 걸린다. 이곳까지만 와도 지옥을 맛본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정상까지는 조금 더 올라야 한다. 도성 조성 당시 인부들은 성돌을 들고 이곳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하면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왕산 정상에 서면 도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 나라를 창건하면 왕권의 존엄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지역의 치안과 방위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도 맨 먼저 종묘와 사직을 지었고 궁궐과 관청을 짓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한양도성을 쌓았다. 한양은 외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인 것이 특징이다.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내사산으로 둘러싸고 있고 그 사이로 청계천이 흐르는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내사산을 보호하는 형태로 외사산인 북한산, 아차산, 관악산, 덕양산이 한 번 더 도시를 둘러싼다. 외사산에는 외수인 한강이 흐른다. 산으로 둘러싸여 앞뒤로 강이 흐르는 풍수적으로 매우 좋은 곳에 도성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태조·세종·숙종·순조, 그리고 현대에 복원된 다양한 성돌의 역사를 함께 볼 수 있는 성벽
곡성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 현재를 거닐다


아쉽지만 정상을 뒤로 하고 하산하는 길, 펼쳐져 있는 두 가지 이름의 바위가 있다. 치마바위 혹은 글자바위라고 한다. 조선 최고의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 때 처단 세력 중 하나인 신수근은 중종의 부인이었던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였다. 중종반정 세력의 입장에서는 반대하던 세력의 딸을 왕비로 둘 수 없어 폐위시키기에 이르렀고 단경왕후를 원래 살았던 인왕산 자락으로 쫒아낸다. 신씨를 그리워하던 중종은 매일같이 경회루에 올라서 인왕산을 바라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신씨는 즐겨 입던 붉은 색 치마를 펼쳐놨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 치마바위다.

또 다른 이름인 글자바위는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펼칠 시기, 인왕산 바위에 천왕폐하만세와 관련한 글자들을 새겨 넣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복 후 시민단체에서 글자들을 모두 쪼개 지금은 어렴풋한 흔적만 있고 거의 없어졌다. 일본의 만행이 산기슭 곳곳에까지 미친 현장을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다.

한양도성의 긴 여정 끝, 성벽 안쪽의 넓은 길에서는 도심의 고층빌딩을 바라보며 편히 걸을 수 있고, 바깥쪽 오솔길에서는 담쟁이넝쿨과 고풍스러운 성벽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명시설이 잘 돼 있어 밤에 보는 성벽의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 같다.

이번 인왕코스의 종점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서 인왕산 자락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했는데,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으며, 가까이에 윤동주문학관도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한양순성길 제1 북악코스가 시작되는 창의문이 있다.

치마(글자)바위

4시간에 걸친 인왕산 등반은 보통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양 도성의 종착지로서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옛 사람들의 피와 땀, 아픈 역사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다시 만나듯, 한양과 서울,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한양도성은 그렇게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무릇 오래된 것은 그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다음 세대에게는 더욱 농축된 의미이자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으려면 지금의 도시를, 자연과의 연결 안에서 보전하고 가꿔가야 할 것이다.

한양도성 순성길 4코스 인왕산 구간 안내

구간 : 숭례문-남지 터-소의문 터(서소문)-배재학당-정동교회-창덕여중 후문-돈의문 터-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선바위-치마바위-윤동주 시인의 언덕-윤동주 문학관-창의문

소요시간 : 약 4시간

박희정 기자  doban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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